2024-08-13 HaiPress
성균관,500년 왕조를 지탱한 이념의 산실
유생들(1904년). 조선시대 사대부는 과거급제가 인생의 최대 과업이었고 이를 위해 반드시 성균관에 입학해야만 했다. [미국 헌팅턴 도서관(잭 런던 촬영)] “성균관 옆에서 병들어 누우니,엄동설한에 궁핍하기까지 하구나. 천리 밖 부모님 생각 간절하고,미천한 한 몸 대궐만 그리웁네(病卧賢館側,窮冬白雪飛. 懷親千里隔,戀闕一身微).”
김수인(1563~1626)의 <구봉집(九峯集)> 중 ‘病卧泮中(병와반중·성균관 공부중 병들어 누워)’의 한 대목이다. 경상도 밀양의 선비 김수인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46세에 과거합격 하나만을 바라보고 성균관에 입교했다. 늦은 나이에 객지생활은 고달팠고 중병까지 걸리자 향수병이 심해졌다. 김수인은 장의(掌議·학생대표)로 있으면서 광해군(재위 1608~1623)에게 인목대비 폐모의 부당함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했다. 인조반정 직후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과거급제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홍직필(1776~1852)의 <매산집(梅山集)>에 실린 ‘김수인 행장(行狀)’은 “성균관에 있는 4년 간 명망이 성대하여 상께서 한창 등용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별세하였으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