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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74人,老교수에 바친 '철학 대장경'

2024-08-24 HaiPress

팔순의 한국 철학계 거목


이명현 '철학과 현실' 발행인에


후배들 2천쪽 책 4권 헌정


플라톤·붓다·니체 등 총망라


李교수 "후배들 고마울 따름


철학은 현실 바꿀때 값어치"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철학과 현실,현실과 철학' 출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년의 첫 직업은 '목욕탕 뽀이(boy)'였다. 홀어머니 모시고 생계 꾸리던 소년은 어른들 목욕탕이 일터였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이니 속칭 '때밀이(세신사)'란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뽀이가 출근한 목욕탕의 탕물엔 때가 이끼처럼 둥둥 떠다녔다. 손님들이 '박수'를 치면 '뽀이'가 달려가 잠자리채로 때를 건졌다. 195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뽀이'는 이제 팔순 노인이 됐다.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선 그를 위한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가르치는 전국 74인의 교수가 오직 그를 위해,인세 한 푼도 받지 않고 총 2000쪽짜리 방대한 철학서를 인쇄해 '헌정'한 것.


이날의 주인공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한국에 처음으로 알린 '한국 철학계의 거두'이자 계간 '철학과 현실' 발행인인 이명현 교수(85)다. 이날 열린 출간간담회에서 이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토록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이런 책을 함께 써냈다는 건 한 명의 학자로서 고개가 숙여지는 일입니다. 너무 감사하지요."


전국 74인의 교수가 머리를 맞대고 이 교수에게 헌정한 책은 '철학과 현실,현실과 철학'(21세기북스)이다. 인류사 철학의 대계(大界)를 지도처럼 그려낸,귀중한 벽돌책이다.


플라톤과 키케로,그리고 붓다와 공맹(孔孟) 등 철(哲)의 선각자를 조명한 1권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철학의 황금기를 개시한 칸트,헤겔,니체,쇼펜하우어를 담은 2권,불교철학과 인도철학 등을 조명한 3권,그리고 현대 분석철학의 영웅들인 하이데거,하버마스,루만을 종횡무진한다.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이 교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학자들을 불러모은 이후에야 이실직고했기에,이 교수는 후배들이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이날 황금비단에 싸인 네 권의 책 세트가 헌정되자 마이크를 잡은 거목(巨木)은 자꾸만 옛길을 되돌아봤다.


"목욕탕 뽀이에 이어 전차표 판매원으로도 10대를 보냈습니다.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면 안되니 다리 옆에 소변통을 놔두고 일했죠.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거쳐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에 갔고,독학으로 외국어를 학습해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동서양 철학자들이 산출한 철학적 작업은 그들이 살면서 당면했던 문제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처방,응답의 궤적이지요."


이 교수가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참여한 건 1989년이었다. 이 제목처럼 이 교수의 철학은 현실에 기반한다. '철학은 현실에서 시작해 현실을 바꾼다'는 게 그의 철학 모토다. 숭고한 사상도 고뇌도,어디까지나 엄숙한 현실 인식 위에서 잉태되는 염결한 열매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세계는 철학적 사고의 원자재 공급지입니다. 원자재를 공급받지 않고는 현실에 응답하는,살아 있는 철학이 태어날 수 없어요. 철학도들은 보통 사람들의 애환의 현장 속에 뛰어들어가야 합니다. 책 속 언어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하지요."


이 교수는 서울대 교수 재직 중 4년1개월간 야인으로 살았다.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1980년 신군부 정권이 그를 교단에서 끌어내렸다.


그러나 1984년 서울대 정교수로 복직했고,YS정부에선 교육부 장관을 지내며 '5·31 교육개혁'의 바통을 잡았다. 2008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철학자대회'를 서울에 유치한 일도 이 교수의 최대 공적 중 하나로 꼽힌다. 서양 주류 철학계가 '철학의 변방' 한국을 주목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이 교수는 철학을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라고 은유해왔다. 철학이 없는 현실은 내비게이션 없는 항해이며,철학은 시대가 해명해야 할 과제를 명료히 한다는 점에서다. 그의 사상에서 '철학'과 '현실'은 길항하고 조응한다.


"인간은 절대적 진리를 갈구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絶對)는 신의 자리가 될 순 있어도 인간의 자리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대와 상황이라는 제한 속을 살아가지요. '시간과 상황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의 파악'이란 인간의 희구일 뿐이에요. 철학은 늘 현실에서 시작해 현실을 바꿔야 합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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